발에 붙은 흙을 털고 있는데 텅 빈 열차가 플랫폼을 가득 채웠다 타오르는 유리창이 밤을 위한 마음을 매만졌다 선물이 있다고 해서 기다렸다 밤에 보니 더 근사한 모습이었다 햇빛보다 밤빛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역에서 떠나 조금 걷다가 사람들이 모인 곳을 지나가는데 괜히 부끄러웠다 이미 빠른 걸음을 더 서둘렀다 아까 본 유리창처럼 온몸에 붉게 열이 났다 꽤 오래 걸었는데 아직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드문드문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별 하나 없는 밤이었다 이제서야 몇마디 얘기를 나누는 데 도대체 할 말이 없었다 낮에 전화로 나눈 얘기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낮에 보자고 할 걸 그랬다 마을 테두리를 크게 한바퀴 돌아 역으로 돌아오는데 멀리서 기차소리가 들렸다 오늘 우리 마을을 지나는 마지막 여객 열차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서두르지 않았고 열차가 한번 더 플랫폼을 가득 채우는 모습을 때맞춰 함께 바라보았다 열차가 역을 떠나고 나는 손을 흔들면서 그제서야 이 얘기 저 얘기를 시작했다 미소가 오가며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알아서 지워냈다 역이 열차를 완전히 떠나고도 한참 플랫폼 위에 그대로 있었다 이내 마지막 열차를 보낸 역에 불이 다 꺼졌고 그 어떤 빛도 나의 형태를 드러내주지 않았다 나는 피곤하지도 조급하지도 아쉽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주변을 완전히 채운 어둠에 나도 어둠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환희와 기쁨의 감정이 어린 감정처럼 느껴졌다 그 밤의 어둠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기차는 역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장치 오류로 탈선한 화물열차가 기차를 향해 마주 달려와 충돌해 많은 사싱자를 내었다 워낙 어두운 밤이었기에 사고 수습이 늦어졌고 더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열차회사와 지역정부는 유족들에게 피해보상을 약속했지만 결국 오랜 소송전으로 이어졌고 소송이 끝날때쯤엔 아무도 그 일을 기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