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그 시작이 스스로에 대한 오해든 상대방에 대한 오해든 오해는 씨만 뿌려주면 알아서 세계관을 구축하기 때문에 어렵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보다 편안하다. 한참 전국적으로 황색언론이 득세하던 시절에 어떤 사람들은 책을 쓰고 근현대사를 현대에 맞추어 포장해서 자기주장의 당위성을 끼워맞췄다. 그 중 어떤 사람은 나의 부모님 옆집에 살고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아끼던 라디오 방송을 없애버렸다. 가장 가증스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시스템 그 자체보다 더. 그 당시 그들의 궤변에 심취해있던 동료들은 나에게 그들이 낸 여러권으로 된 책을 선물했는데 나는 단 한 장도 읽을 수 없었다.
오해가 이렇게 가벼운 뉘앙스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속았다는 기분 때문일 것이다. 오해가 만들어 낸 인과에서 쉽게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이유는 오해가 현대에 남은 유일한 면죄부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홀가분한가. 모두가 마음 편히 휴가를 보내면 좋겠다. 그러나 수치스러움은 전염성이 강하고 종종 사람이 아닌 다른 대상에 옮겨 붙는다. 자동차나 돌맹이 그리고 가상현실 속의 재산따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