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쥐고 있던 시간이 진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계속 손수건으로 훔쳐 닦다가 보니 주변이 다 헐어 버렸다. 바세린은 순수 페트롤리움 젤리이기 때문에 정제가 쉽지 않은데 이는 제조 과정에서 조금의 불순물만 섞여도 유독성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 하늘에 기운 없어 보이는 해가 매달려 있었고 꼭 내 머리가 휘청이는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시간을 가늠하기 힘든 밝기였다. 한때 우리는 모두 의미 있는 일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리를 다친 친구와 외투를 빌려주었던 친구와는 오래 연락을 했었다. 추운 날씨에 입술이 건조했는데 바세린 말고는 다른 보습 제품을 쓸 수 없었다. 늘 무언가 첨가되어 있어서 알러지 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시간을 절대적으로 보이는 숫자 몇 개로 벽에 고정해 두고 싶어도 물에 반사된 빛처럼 일렁이다가 금방 사라져 버리고 만다. 시간은 공평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고 경우에 따라 자아를 가지고 미래라는 허상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오죽하면 시간을 돈 주고 산다는 얘기까지 한다. 그런데 돈도 시간과 마찬가지이다. 무한히 늘어나는 십진법으로 아무리 멋지게 장식을 해도 정작 그 실체를 아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시간도 돈도 사람이 만들었다. 사람이 만든 것 중에 완전한 것이 없고 그러다 보니 조금씩 누적되는 소모와 쇠락에 그 실체와 의미가 흐려진다.
가장 좋은 말을 건네면서 작별의 시간을 나누고 싶었다. 잘 개어놓은 수건 같은 헤어짐. 써보지 않고도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안다. 하지만 가장 좋은 말을 생각해 내느라 좋은 말을 건넬 힘을 모두 쓰고 말았다. 그럼 대신 가장 많이 나눴던 얘기를 하자. 그런데 인사를 하느라 부른 서로의 이름 외에는 특별히 대단한 얘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 외엔 안부로 묻는 근황 정도. 답변은 내용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자주 볼 때는 일주일의 절반 이상을 함께 했다. 어쩌면 나눈 얘기가 너무 다양하고 많았기 때문에 서로의 이름 정도만 기억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한순간이 지나면 그 중요도에 비례해서 체감되는 순간의 길이가 사후에 결정된다. 물리적인 시간은 그저 먼 나라에서 쓰는 도량형의 일종일 뿐이고 실제로는 중요도에 따라 순간들과의 동거 기간이 정해진다. 과거에 만난 어떤 여행자가 아직까지 옆에서 나와 수다를 떠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방금 나를 달려오는 트럭에서 구해준 사람은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망각이 시간의 기준이 되고 미처 잊지 못한 일들이 시간의 주인이 된다. 망각은 인간이 타고 난 가장 탁월한 생존 기술이다.
악수를 나누는 데 너무 어색했다. 사실 우리끼리는 악수할 일이 없었다. 처음부터 농담을 건내는 사이였었나 보다. 같이 보낸 시간이 소나기구름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푹 꺼져버린다. 다시 얼굴을 마주할 때는 무자비한 망각의 난도질에서 살아남은 기억들만 너와의 시간을 정의할 것이다. 어떨 땐 길었고 어떨 땐 짧았지만 결국 그 평균치로 너와의 관계를 평가할 것이다. 그저 서로 열심히 이름만 부르는 사이. 어쩌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별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지나간 시간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게 억울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