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색이 다 같았다. 모양에 상관없이 흙이 잔뜩 묻어서 원래 색을 잃어버렸다. 그나마 누가 더 오래 있었는지에 따라 누렇게 뜬 정도가 달랐다. 흙 속에는 여러 가지 광물들이 있는데 어떤 광물은 산소와 만나면 색을 바꾸었다. 해 질 녘 언덕이 멀리서 보면 유리같이 보이는 게 그 이유였다. 다만 그 풍광을 관광용으로 개발하는 대신 파헤쳐 자원으로 팔아버린 게 지역 쇠퇴의 이유였다. 지표면의 광물이 다 소진되고 난 후에는 광물이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리 깊이 갱도를 파고 탐사를 해도 결과는 같았다. 절망이 인근의 모든 대기를 오염시켰다. 절망은 전염성이 강해 금방 깊은 고립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떠났는데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떠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떠나지 않은 것이었다.
마지막 남은 식료품점이 주인의 건강 악화로 인해 문을 닫았다. 그 누구보다 지역의 부흥을 위해 힘썼던 사람이었다. 사비를 털어 적자를 메웠고 그 덕에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떠나지 않고 살 수 있게 도왔다. 지금은 잘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다. 그런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행동을 못 견디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도 다 떠나고 혼자 남았다. 그런데 건강까지 악화되니 모두가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특별히 누군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들 하루하루가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이었다.
식료품점 주인이 보이지 않기 된지 몇 달 후에 지역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가 건강 악화로 마을을 떠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액수의 복권에 당첨되어 그간의 생활을 청산하고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그가 완전히 다른 인상을 풍기며 값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 걸 봤다는 사람이 생기면서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절대 그럴리 없을거라고 했던 사람들도 같은 소문을 계속 듣다 보니 그 소문에 빠져들어 갔고 가뜩이나 소식이랄게 없는 곳에서 소문의 위세는 정말 꺾일 줄 몰랐다. 지역의 몇 안 남은 사람들은 (정말 몇 명 되지 않았다) 식료품점 주인에게 연락을 취해보는 대신 배신감에 잠식되었다. 절망감이 배신감을 만나니 분노가 태어났다. 그리고 분노는 회색빛으로 변해가던 사람들의 얼굴에 약간의 붉은 빛을 가져왔고 쉽게 꺼질 거라 생각했던 분노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 쓰지 않고 방치해 둔 기운을 연료 삼아 시간이 지날수록 더 거세게 불타올랐다. 지역 내 경제가 완전히 붕괴된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 사람들은 잠도 자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 돈을 벌어와 자신들의 지역에 투자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복권으로 인생을 바꾼 이웃 하나가 지역 전체를 또 다른 절망에 몰아넣는 대신 활기를 가져온 것이다. 그것은 아마 비상식적으로 이타적인 식료품점 주인을 늘 모자란 사람으로 여겼던 지역 사람들이 느낀 괘씸함에서 비롯된 일이었을 것이다. 가장 바보같다고 생각했던 대상의 변화가 부러움이나 추가적인 절망 대신 ‘내가 아직 이렇게 사는데 감히 네가?’ 라는 괘씸함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 기형적인 동기부여의 효과는 지역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변화시켰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폐쇄됐던 공기관들이 다시 문을 열기 시작했다. 언론에서 지역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보도하자 다른 지역 사람들이 호기심에 몰려들었다. 지역은 누가 봐도 이전에 비해 생기가 넘쳤다. 그런데 지역의 토박이들은 어딘가 이상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흡사 사이비 종교 교도 같은 눈빛이었다. 맹목적인 목표에 대한 헌신. 그들은 지역의 부흥을 조금도 즐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어디론가 끊임없이 일을 하러 떠날 뿐이었다.
어느 날 진작 타지역으로 떠났던 식료품점 주인의 부인이 돌아왔다. 자신은 한 번도 지역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몸의 여러 부분에 문제가 너무 많았지만,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 자선 의료기관을 전전하다가 갑자기 온몸에서 분홍빛 액체를 내뿜으며 폭발하듯이 급사했다고 했다. 부인은 남편의 처참한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앞두고 지역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서 돌아왔다고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복권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맥이 풀려 버렸다. 장기간 무리해서 일하던 사람들이 맥이 풀리자 너무나 허무하게 하나둘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고 지역의 토박이들이 거의 다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스스로 삶을 마치려 했던 식료품점 가게 주인의 부인은 황량해진 유리빛을 내던 광물이 있던 언덕에 어떤 이유에선가 이런저런 잡초들을 가져다 심기 시작했는데 그중 자생력이 강한 맥문동이 금세 언덕을 뒤덮었다. 노을에 분홍빛으로 뒤덮인 언덕을 보고 죽은 남편을 떠올리던 부인도 곧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지역의 절망적인 침체기를 겪은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이야기는 잊혔고 지역은 타지 사람들에게는 관광자원이 있는 기회의 땅처럼 소개되었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분홍빛 꽃들이 언덕을 빼곡히 채우고 관광객들은 나날이 늘어갔다. 지역의 원주민들이 ‘유리 언덕’이라고 부르던 언덕은 ‘분홍 언덕’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모두가 언덕의 원래 모습을 잊어갈 때쯤 어떤 노인이 언덕의 예전 모습을 그린 그림을 기념품으로 팔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은 지금과는 다른 그림 속 언덕의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유리빛을 띄는 언덕의 비현실적인 묘사에 매료되어 그림을 사 가곤 했다. 그림을 파는 노인은 늘 말쑥한 옷차림으로 좋은 차를 타고 다녔다. 그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늘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에는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다. 비밀이 많은 사람이 웃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