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불이 켜져도 길을 건너지 않는다. 실은 신호는 몇번이나 바뀌었다. 반대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돌아선다. 돌아서는 발걸음은 단호하고 기다려온 시간과는 무관한 세계의 것이다.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느라 너에게 아무 말 못한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빚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달리기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차는 가는 둥 마는 둥도 간다. 어차피 결국 아무 사이가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면 쉬운데 자꾸 옷깃 얘기를 한다. 다들 평소에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 궁금하다. 무얼 걸쳐도 땀이 주룩주룩 흐르는 날이 바로 어제였는데 오늘은 다리가 서늘하다. 바람이 다리를 스치는 모양이 노란색 점멸등처럼 뜨끔하다. 쉬운 이야기들을 탑처럼 쌓아서 어렵게 무너트린다. 너를 위한 나의 이야기이다. 쌓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냥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늘 무슨 의미든 던져놓고 그것이 모여 다른 어떤 의미를 같게 되길 바랬다. 사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는 없었다. 유난히 달이 가깝게 혹은 멀게 보이는 날에는 달을 쥘 수도 있을 거 같다. 달을 따오겠노라고 우주로 떠난 인류는 달에 닿긴 했지만 겨우 몇걸음 못 디디고 돌아왔다. 나는 천문학자가 되어야 했다. 별들이 움직이고 나는 그냥 동물과 사물을 연상하여 그들을 기념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