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표현하는 데 게으름보다 좋은 상태가 없다. 5도 화성까지 올라가기가 힘들어 증4도, 혹은 4도까지만 올라간다던가 아예 침대에서 종일 중력을 온 몸에 분산시켜 보내는 방법도 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 피곤하다. 피곤의 관성이 만들어지면 계속 두려운 상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는 것도 모르게 되고 다시 알고 싶어지지 않게 된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해왔는데’ 같은 생각은 금방 게으름의 풍요로움에 잠식당한다. 게으름이 스스로 두려울 정도로 만연해지면 이미 늦었다. 아주 특별한 계기 외에는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벽에 맺힌 물방울들이 벽을 타고 바닥으로 주욱 떨어진다. 한기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벽은 오히려 땀을 흘린다. 이불이 축축하다. 온열기는 애초에 고장이고 몇 겹씩 껴입고 누워있느라 쉬고 있는데도 쉬는 것 같지 않다. 분위기를 바꿔보려 침대에서 일어나 내가 이사오기 전 살던 사람이 두고 간 피아노를 두드려 보다가 금방 그만두고 다시 침대에 앉는다. 방금까지 누워있던 내 자리에 손을 넣었는데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창문에 뿌옇게 김이 서려있어 날씨가 어떤지 알 길이 없다. 뭐라도 먹어야 몸에서 열이 날텐데 한기에 몸이 움츠러 드니 식욕도 없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니 침대에 쓰러지듯 다시 눕는다. 아직 개장하기 전의 초여름 해수욕장 바다에 풍덩 빠지듯이 누우면서 오히려 정신이 바짝든다. 몸을 이불로 아무리 감아봐도 축축한 이불에는 온기가 깃들 자리가 없다. 거의 밤새 뜬 눈으로 지내다가 일하러 갈 시간이 되어서야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한다. 추워서 샤워를 건너 뛰고 싶지만 샤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 같아서 일단 물을 틀어 놓는다. 한참 알몸으로 덜덜 떨어야 차갑지 않은 물이 나온다. 뜨끈한 온천은 취미가 없어서 제대로 가본적도 없지만 샤워할때마다 너무나 그립다. 다음 명절에 고향에 돌아가면 꼭 한 번 가봐야지 생각한다. 그래봤자 고향에 가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밤새 입고 있던 옷을 다시 입고 집에서 나왔는데 밖이 더 따뜻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밖에서 지낼 걸 그랬다. 붐비는 열차 안에 끼어앉아 있으니 솔솔 잠이 온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고 말았다. 허둥지둥 내려서 반대편 열차를 기다린다. 졸다 깨니 바람이 더 차게 느껴진다. 열차는 언제 온다는 알림도 없다. 내가 조금 더 게을렀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어중간하게 게으르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싶었다. 어디서 열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고개를 빼고 보니 내가 타고 온 방향에서 열차가 한 대 더 다가오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열차를 통틀어 두 명이 내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열차에 올라탔다. 이 방향 종점에는 온천이 있었던 것 같다. 일단 빈자리에 앉아서 다른 이가 남기고 간 온기를 찾아본다. 온기를 찾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종점에서 미화원분이 나를 깨우셔서 일어났다. 아직 오전이고 이제 해가 좀 나서 온도가 오르고 있었다. 역사에서 나오자 마자 온천 표지판들이 있었다. 표지판을 따라가다 나오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세상은 늘 내 마음같지 않는 일들로 가득하다고 생각했는데 열차를 잘못타고 아침 밥을 먹고 나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온천으로 향했는데 다음 해 9월까지 공사중이다. 잠깐 서성이다가 빠르게 걸어서 다시 열차를 타고 사무실로 향했다. 특별히 어떤 표정을 짓지 않았는데 상사가 내 얼굴을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업무를 얼마 하지 않았는데 점심시간이었다.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서 사무실에 남아있었다. 오랜만에 머리 속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무실은 적당히 따뜻했고 벽에 결로도 없었다. 그 순간이 영원하길 바랬다. 아쉽게도 얼마 안 가 동료들이 사무실로 돌아왔고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오후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올라가는 계단이 유난히 삐걱거렸다. 방에 도착하니 계단을 오르느라 몸에서 열기가 좀 났다. 열기가 다 사라지기 전에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잠이 들어 아침까지 잠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잠에 들지는 못했다. 오늘도 특별히 침대 밖에서 무슨 일을 하지 않는다. 손이 금방 시려워 지기 때문에 겨드랑이에 끼고 있느라 팔이 금방 뻑뻑하게 굳어버렸다. 갑자기 아침 식사전에 식당에서 본 화로들이 생각났다. 일제히 불을 내뿜으며 손님들의 주문을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퍼런 불빛이 시원해 보였다. 커다란 푸른 불빛으로 걸어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옷이 모조리 타버리고 살이 검게 변하는데 시원하다는 생각을 한다. 완전히 다 타서 잿가루도 남지 않게 되니 추위가 별로 두렵지 않았다. 이상하개 홀가분 한 기분에 오랜만에 홑겹으로 옷을 입고 잠이 들었다. 해가 다 뜰 때까지 늦잠을 잤다. 티벳의 승려들이 명상으로 몸의 온도를 조절하여 눈밭에서도 몇 일 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그 생각을 하니 멍하게 보낸 시간이 그렇게 아쉽지 않았다. 물을 틀고 기다리는 대신 차가운 물에 뛰어들어 따뜻한 물이 나오기 전에 비누칠까지 다 마치고 나왔다.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열차를 타고 사무실에 향하는 길에도 오늘은 내릴 역을 지나치지 않고 한 번에 내렸다. 사무실에는 화초가 하나 있었는데 사람들이 생각없이 차가운 물을 부어 대느라 이파리 몇 개가 벌써 까맣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물을 한 바가지 담아다가 천천히 화초에 부어주고 썩은 잎들을 떼 주었다. 화초는 앙상해졌지만 아직 죽지는 않은것 같았다.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푸른 불빛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불빛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뛰어 들었다. 화초를 가지고 들어올 걸. 아쉬운 와중에 나는 또 온통 불타버렸다. 내가 불타는 모습을 동료들이 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주변을 돌아봤는데 다들 바쁘다. 불타는 모습에 놀라 부산을 떠는 것 보다 이 편이 나은 것 같다. 오랜만에 시원한 웃음이 나온다. 그제야 다들 나를 쳐다보고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어본다. 나는 대답없이 웃다가 다시 원래 표정을 지었다. 그새 푸른 불빛은 사라지고 나는 다시 멀쩡한 몸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 화초를 보는데 잎을 다 떼 놓으니 모양이 영 낯설었다. 업무를 마치고 퇴근 전에 내 책상에 있던 스탠드를 화초쪽으로 옮겨 빛을 쏘아 주었다. 아마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화초가 죽어가는 길이 조금 밝아졌을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