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치는 사람을 미리 보지 못해서 자꾸 부딪혔다. 거듭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더 세련되게 하고 싶었는데 역효과가 났다. 어쩌면 침묵이 가장 좋은 대답이라는 말이 맞는데 놓아버리지 못해서 이 모양인 것 같다. 왜 그럴까. 여러 관성 중에 자신을 더 거룩하게 하는 관성이 가장 지독하다면 문명사회를 탓해야 할 것 같다. 문명은 늘 개인의 잘못을 물으면서 희생을 요구한다. 모두가 다 하니까. 그런데 오늘 던진 레몬 껍질에 고양이 한 마리가 맞았다. 겨냥해서 던진 껍질이 아니라서 세게 맞지 않았지만 워낙 요란하게 울어서 동네가 잠시 시끄러웠다. 아름다운 3도와 7도들이 동시에 자기를 봐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데 둘 다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밑에 있던 9도와 감 5도가 같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도미넌트 사운드야. 해결이 필요해.’ 이렇게 무책임한 말이 없다. 만약 모두가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했다면 우리는 영원한 원시를 살고 있었을 것이다. 야만과 원시를 구분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던 가게는 자꾸 동네를 옮겨가며 장사를 한다. 아마도 그런 면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못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에 집중을 하자. 이런 마음이 깊어질 수록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의 종류와 폭이 줄어든다. 다만 그 와중에 위안은 비슷한 사람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이다. 급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자리를 나섰는데 마음이 불편하다. 마음은 원래 불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거울 같은 것이라고 늘 들어왔는데 갈수록 자기 주장이 강해진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이야기 하지만 마음은 그림자 정도의 존재이다. 왜 할 수 없는 일을 늘 서로에게 강요할까. 늘 말은 쉽고 우월감은 실수와 경험을 혼동하는 사람들의 차지이다. 단 한마디에라도 자신을 담을 수 있다면. 우리는 너무 많은 배를 눈 앞에 두고 아무곳도 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배가 떠있는 상태 자체로 완전할 수 있다면. 내가 오래된 상가 일층에서 만난 노인은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귀담아 들어야 할 얘기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시절이다. 어쩌면 늘 그래왔고 계속 그럴 것이다. 애써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기 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편이 속 편하다. 비석같이 육중한 문제들이 해결되고 나면 남은 일들은 자아를 가지고 나를 공격한다. 도망은 선택지에 없기 때문에 나를 그 상황에 맞춰 나가는데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컴퓨터 백업을 했을 때 랩탑의 배터리가 부풀어 터질 줄 어떻게 알았을까. 매일 밟고 지나가는 계단의 재질이 금속인지 나무인지 어떤 재질이 내 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중요한가. 나는 그저 오르내릴 뿐이다.발은 발대로 신발은 신발대로 그 모양을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