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를 여러단 사서 씻고 있는데 자꾸 물컹하게 썩기 시작한 부분들이 손에 걸린다. 음식물 쓰레기 봉투가 거의 다 차버렸는데 썩은 파가 계속 나온다. 들판위에 부는 바람이 가는 길 위의 모든 것을 넘어뜨린다. 돌풍에 나무가 쓰러지고 언덕이 떨어진 나뭇잎으로 가득찼다. 그래도 불어야 하기 때문에 바람은 계속해서 무언가 넘어뜨리고 떨어뜨린다. 오버부킹 된 열차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는다. 몸은 거짓말하지 않지만 내 머리는 자꾸 장난을 친다. 미끌미끌하게 물러진 파들을 다듬다 어느새 멀쩡한 파도 억지로 문지르고 있다. 무르기 직전의 파들을 열심히 주무르면 이내 손이 미끄러워진 표면을 타고 내려온다. 나는 아마 파를 먹기 위해 샀을테지만 지금은 그냥 내 지문 아래 걸리적거리는 섬유조직일뿐이다. 열심히 파들을 괴롭히다 보니 허기가 진다. 배를 채우는 것도 비우는 것도 일인 세상에 살개 되었다. 시와 산문의 차이는 글이 데려가는 목적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인지 다른 어느 곳인지의 차이라고 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 무언가로 가득 차있어서 시인들이 시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늘 무언가 만들어 내고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들에도 이름을 붙여서 공간을 가득 채워 버린다. 사람이 가득한 열차에서 노을을 바라본다. 조만간 뒤집어 놓은 모래시계가 아랫쪽의 빈공간을 다 채워버릴 것이다. 분명히 거기까지여야 하는데 모래시계는 도로 뒤집지 않아도 계속 아래로 흐른다. 그게 먼지든 시간이든 도서관이든 중요하지 않다.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 말을 만들면 아래로 흐르게 된다. 뉴턴이 사과를 보고 갈릴레이가 깃털을 본다. 나는 해가 떨어지고 있는 내는 빛으로 완전히 다른 색이 된 들판을 본다. 내가 채우던 음식물 쓰레기 봉투는 파로 가득 찼지민 지금도 그 틈으로 무언가 채워지고 있다. 나는 파를 못살게 굴었다는 사실이 더 이상 미안하지 않았다. 고작 손질하던 대파를 한두개 못쓰게 만들어 버렸을 뿐이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악랄한 악당들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