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서 무언가 보게 될 줄 알았는데 결국 내 그림자만 잔뜩 쌓여있었다. 그렇게 멋지게 석양이 하루를 마무리할 줄 알았다면 진작 새 법안을 반대하는 격렬한 데모에 투신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십 년 전에 나는 명분 없는 전쟁을 반대하느라 화장실에 실린 채로 옮겨지고, 나무 위에 올라가고, 언어를 배우는 방법을 문화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흰머리가 파 뿌리 될 때까지 한 사람은 계속 춤을 추면서 새로운 춤을 배웠고 한 사람은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사람들 뒤에 숨어있었다. 둘 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지만 어느 쪽이 더 같이 있기 좋았을까.
내가 이걸 그때 봤다면 지금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이걸 그때 보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시험이 취소되는 계절에 수염이 허리까지 자란 거인이 성큼성큼 걸어오면 그게 신호라는 것을 전부 알고 있다. 거인의 이름을 지역마다 다르게 부르지만 결국 명칭의 의미는 비슷한데 그 뜻은 ’납작한 동전’이다.
어떤 이름을 가지고 살면 더 이상 스스로 괴롭히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마침 내가 사는 동네에는 스스로 이름을 짓는 사람이 많다. 내가 속 편하게 살려면 내 속이 상당히 작고 좁다는 것을 미리 밝히고 내가 하는 일이 상업이 아닌 연구 목적임을 명시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실제로 계속 계란이나 감자, 혹은 제철 야채를 삶거나 데치다 보면 가장 이상적인 정도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해도 소금을 아무렇게나 뿌리고 물이 대충 끓으면 건져놓는다. 건진 야채는 어떨 때는 그 색이 더 선명해지고 어떨 때는 흐물거리느라 정신없다. 멀쩡한 감자, 계란에 젓가락을 찔러넣는다. 제발 아니길 바라지만 늘 덜 익어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이름을 지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