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도로 오는 완전함을 투명하다고 얘기하면 물이나 긴장감이 떠오른다. 다만 한쪽은 정신병을 해체하고 한쪽은 무장한다. 둘 다 투명하기 때문에 한쪽은 어떤 장애도 없이 소리를 내고 한쪽은 다 흡수한다.
어떤 과거의 나는 호숫가에서 책을 읽으면서 소리를 지르고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며 외로워하며 바싹 마른 물의 표면을 동경했다. 버스가 눈앞을 많이 지나다녔지만, 몇시간씩 걸어 다녔고 호숫가의 극적인 광경보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막연한 산책에서 위안을 얻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 쉬운 해법이 없다.
투명은 스스로 모순되는 개념이다. 피타고라스의 살인을 정당화하고 인류의 자발적 헌신을 원하면서도 영원한 해방감과 의존에서 오는 안정감을 당연시한다. (거울안에서는 모두가 무죄이다.)
화장실 바닥을 거친 솔로 닦다 보면 살사 리듬이 들리고 몸은 의지와 상관없는 상태가 된다. 솔이 미처 들어가지 않는 부분은 굳이 손가락 발가락을 다 사용해서 닦아내려 한다. 나는 왜 이렇게 일차원적인가. 공간도 면도 선도 아닌 바닥의 점 하나를 손톱으로 긁어내고 있다. 사실 쉽게 사는 사람도 많다.